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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주얼에 강한 아메리칸 스타일



미국인들의 실용주의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는 아메리칸 수트는 아이비리그 수트(Ivy League, 미국 동부에 있는 8개 사립대학의 총칭) 혹은 색 수트(sack suit)로도 불린다. 1900년대 초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와 제이 프레스(J. Press)에 의해 대중적인 복식으로 자리 잡았던 미국식 수트는, 어깨 패드가 아예없거나 몹시 얇아 자연스럽고도 단정한 어깨라인을 보인다. 다만 상의든 하의든 사이즈는 큰 편이다.
주로 싱글 브레스티드(single breasted, 재킷의 가슴 부분이 홑겹으로 되어 있는 스타일), 싱글 벤트(vent, 재킷의 뒤트임)에 2버튼이 많다. 바지는 또한 장식적인 주름 없이 일자로 재단되는 특성을 보인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랄프 로렌(Ralph Lauren), 톰 포드(Tom Ford),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 마이클 바스티앙(Michael Bastian), 톰 브라운(Thom Browne) 같은 미국 디자이너들은 미국 패션 시장의 규모를 막대하게 키워온 동력이지만, 사실 미국 패션은 언제나 포멀보다는 캐주얼에 강한 흐름을 보여왔다. 청바지와 티셔츠 혹은 옥스퍼드 셔츠와 카키 면바지로 상징되는 미국 남성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클래식한 남성복이라면 폴 스튜어트(Paul Stuart)나 브룩스 브라더스, 뉴욕을 중심으로 한 프리맨 스포팅 클럽(Freeman Sporting Club) 정도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화적인 영향에 관한 미국의 범주에 속해 있는 한국의 남자 복식이, 패션에 관해선 영국적인 모든 이미지들을 닮고 싶어 했던 일본만큼 독특하고도 독자적인 발전 양상을 보이지 못한 것은 (애석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일까.



입체적인 구조를 지향하는 브리티시 스타일


남성복 패션이 유명 디자이너나 거대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제조과정이 기계화됨에 따라, 요즘 남자들이 수트의 품질과 본질적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 돼버렸다. 맞춤복이란 왠지 시간이나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는 선입견이 있기도 하고, 기성복에는 고급 수트의 디테일이었던 수작업이 포함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브랜드나 매장의 수가 너무 많아 생각하기가 더 어렵다. 그럴 때 수트의 과거를 이해해보는 건 스타일을 제대로 갖추고 싶은 현재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현대 수트의 원형인 브리티시 수트는 런던의 유서 깊은 최고급 신사복 거리인 새빌로에서 탄생했다. 어깨가 높이 솟고, 허리를 졸라매는 군복을 기초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새빌로 수트는 사이즈가 넉넉하고 실용적인 아메리칸 수트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타이트한 편이다. 실제로 단추를 목 바로 아래까지 잠그는 제복에서 단추를 풀고 라펠을 앞으로 벌려보면 입체적인 구조를 지향하는 브리티시 수트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영국식 수트는 사람 몸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몸판과 소매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를 지향하면서 (그래야만 팔이 움직일 때 몸판이 따르지 않아 결과적으로 착용감이 좋아진다) 자연스러운 라인을 목표로 한다.
싱글이나 더블에 대한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단단한 어깨 라인, 티켓 포켓과 깊게 파인 두 개의 사이드 벤트(vent, 재킷의 뒤트임)는 브리티시 수트의 중요한 특징이다. 바지는 보통 허리선이 높고 버튼 혹은 지퍼 디테일을 선택할 수 있으며, 주로 1개의 플리츠(pleats, 주름)가 있는 제너러스 컷(generous cut)으로 되어 있다.물론 새빌로의 수제 맞춤복 수트는 하나하나의 옷감을 가위로 직접 자르고, 가슴 부분과 옷깃, 칼라, 단춧구멍, 안감, 주머니, 소매를 모두 손으로 꿰매고 하나 하나를 다림질한 것이다. 웬만한 최고급 기성복보다 곱절 이상 비싸다. 새빌로의 맞춤 수트를 경험해본다면 그것으로도 큰 축복이겠지만, 브리티시 수트의 정통적인 방향성으로 만들어진 해킷(Hackett), 기브스 앤 호크스(Gieves & Hawkes), 버버리 등의 기성복 수트를 경험해보는 것도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